타이어 그립
서킷 주행에 입문하면서 이론부터 정리해 보기로 했다. 브레이크를 언제 밟고 핸들을 얼마나 돌려야 하는지는 결국 몸으로 익혀야 하지만, 그 이유를 알고 주행하는 것과 모르고 주행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피드백을 들을 때도 원리를 알고 있으면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출발점은 타이어다. 차량의 성능이 아무리 뛰어나도 노면과 맞닿는 것은 타이어 네 개의 접지면뿐이며, 가속과 제동, 코너링 모두 그 접지면에서 발생하는 힘으로 이루어진다. 이 글에서는 그 힘이 어떻게 발생하고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를 마찰원, 슬립(슬립 앵글과 슬립률), 하중 민감도, 온도와 공기압의 네 가지로 나누어 정리한다.
1. 마찰원
타이어 하나가 노면을 붙잡고 낼 수 있는 힘에는 한계가 있다. 이 한계를 방향별로 그려 보면 대략 원 모양이 되는데, 이를 마찰원(friction circle)이라고 한다. 요구하는 힘이 원 안쪽에 있으면 타이어가 버틸 수 있고, 원 밖으로 벗어나면 미끄러진다.

방향이 달라도 사용할 수 있는 힘의 총량은 같다. 직선에서 최대 제동을 하면 그립을 모두 제동에 사용하고, 코너 중간에서는 모두 횡방향에 사용한다. 두 가지를 동시에 하면 그립을 나누어 사용해야 한다. 원 위의 45도 방향을 보면 제동과 코너링이 각각 약 70%씩이다. 브레이크를 끝까지 밟은 상태로 핸들을 돌리면 차가 회전하지 않고 바깥으로 밀려 나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앞바퀴의 그립을 제동에 모두 사용해 횡방향으로 낼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승용차 타이어처럼 종방향 한계가 횡방향 한계보다 조금 큰 경우에는 타원으로 그리기도 한다. 다만 총량이 정해져 있고 이를 나누어 사용한다는 개념만 이해하면 충분하다.
이 개념은 코너 진입에서 바로 활용된다. 브레이크를 완전히 뗀 다음 핸들을 돌리면 그 사이에 그립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구간이 생긴다. 반면 브레이크를 조금씩 풀면서 그만큼 조향을 더하면 마찰원의 테두리를 따라 제동에서 코너링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다. 이것이 트레일 브레이킹이다. 처음부터 쉽게 되는 기술은 아니지만, 브레이크를 풀면서 핸들을 돌리라고 하는 이유는 이 그림으로 설명할 수 있다.
2. 슬립 앵글
코너에서 핸들을 돌리면 앞바퀴는 돌린 방향을 향하지만, 실제로 바퀴가 진행하는 방향은 그보다 조금 덜 돌아가 있다. 바퀴가 향하는 방향과 실제 진행 방향 사이의 이 각도를 슬립 앵글이라고 한다. 이름에 슬립이 들어가지만 타이어 전체가 미끄러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접지면의 고무가 비틀리면서 생기는 차이다.

접지면을 아래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고무는 접지면 앞쪽에서 노면에 닿을 때 바퀴 방향대로 놓이고, 뒤쪽으로 갈수록 옆으로 끌려가며 비틀린다. 이 비틀림이 차를 옆으로 미는 힘, 즉 횡력이 된다. 비틀림이 커지면 접지면 뒤쪽부터 마찰 한계를 넘어 미끄러지기 시작하고, 슬립 앵글이 커질수록 미끄러지는 구간이 앞쪽으로 넓어진다.
따라서 슬립 앵글과 횡력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형태가 된다.

처음에는 각도가 커지는 만큼 횡력도 거의 비례해서 증가한다. 그러다 어느 지점에서 정점에 도달하고, 그 이후로는 각도를 더 키워도 힘이 늘지 않거나 오히려 줄어든다. 코너에서 앞이 밀릴 때 핸들을 더 돌리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미 정점을 넘었다면 조향을 더할수록 앞 타이어가 낼 수 있는 힘은 줄어든다. 핸들을 조금 풀어 정점 쪽으로 되돌려야 다시 그립을 회복할 수 있다.
정점이 나타나는 각도는 타이어마다 다르다. 미쉐린 자료에 따르면 승용차 타이어는 4~7도 부근에서 정점이 나타나며, 일반적인 도로 주행은 2도 이내에서 이루어진다. 자료마다 수치에는 차이가 있지만, 일상 주행에서 사용하는 구간과 한계 주행에서 사용하는 구간이 전혀 다르다는 점은 같다.
운전자가 손으로 느낄 수 있는 신호도 있다. 횡력이 작용하는 중심은 보통 접지면 중앙보다 뒤쪽에 있어서, 바퀴를 직진 방향으로 되돌리려는 힘(셀프 얼라이닝 토크)이 핸들에 전달된다. 한계에 가까워지면 접지면 뒤쪽부터 미끄러지면서 이 중심이 앞쪽으로 이동하고, 되돌리려는 힘도 약해진다. 이 힘은 횡력보다 먼저 정점에 도달한 뒤 감소한다. 일반 타이어 기준으로 2~4도 부근이 정점이므로, 핸들이 가벼워지기 시작하면 한계가 가까워졌다는 신호로 볼 수 있다.
3. 슬립률
제동과 가속에서도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브레이크를 밟으면 바퀴는 차량보다 조금 느리게 회전하고, 가속할 때는 조금 빠르게 회전한다. 이 속도 차이를 비율로 나타낸 것이 슬립률이다. 바퀴가 차량과 같은 속도로 구르면 0%, 바퀴가 멈춘 상태로 끌려가면(락업) 100%다.
앞의 그래프 오른쪽이 슬립률에 해당하며, 형태는 슬립 앵글과 거의 같다. 슬립이 어느 정도 발생해야 제동력이 생기고, 특정 지점에서 정점에 도달한 뒤 락업에 가까워질수록 감소한다. 미쉐린 자료에 따르면 승용차 타이어는 슬립률 5~15%, 대략 10% 부근에서 제동력이 가장 크다. 바퀴가 잠기면 제동력이 줄어들 뿐 아니라 조향도 되지 않는다. 미끄러지며 끌려가는 타이어는 방향을 바꾸는 힘을 거의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속 쪽에서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 휠스핀이다.
ABS와 트랙션 컨트롤은 슬립률을 이 정점 부근으로 유지하기 위한 장치다. ABS는 바퀴가 잠기려는 순간 브레이크 압력을 줄였다가 다시 높이는 과정을 매우 빠르게 반복한다. 같은 자료에 따르면 ABS는 슬립률을 10~20% 범위로 유지하며, 이 상태에서도 횡방향으로 낼 수 있는 힘이 절반 정도 남는다. 브레이크를 밟은 상태에서도 어느 정도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이유다. ABS가 작동했다면 이미 해당 타이어의 제동 한계까지 사용하고 있다는 의미다.
4. 하중 민감도
타이어를 강하게 누를수록 그립은 커진다. 여기까지는 직관과 같다. 그러나 비례 관계는 아니다. 타이어를 누르는 하중이 두 배가 되어도 낼 수 있는 힘은 두 배가 되지 않는다. 하중이 커질수록 마찰계수가 조금씩 낮아지기 때문이며, 이를 하중 민감도(load sensitivity)라고 한다. 밀리켄(Milliken)의 타이어 데이터를 보면, 하중 900파운드(약 410kg)에서는 최대 횡력이 하중의 1.10배이지만 1800파운드(약 820kg)에서는 0.97배로 낮아진다. 하중을 두 배로 늘렸는데 힘은 약 1.76배에 그친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하중이동 때문이다. 코너를 돌면 하중이 바깥쪽 타이어로 쏠린다. 바깥쪽 타이어는 더 눌려서 그립이 증가하고 안쪽 타이어는 감소하는데, 하중 민감도 때문에 바깥쪽이 얻는 그립보다 안쪽이 잃는 그립이 더 크다. 따라서 좌우 하중 차이가 클수록 해당 축 전체가 낼 수 있는 그립은 줄어든다. 그림의 예시에서는 하중이 50:50에서 20:80으로 쏠리는 것만으로 그립 합계가 100에서 94로 감소했다. 위키백과의 하중이동(Weight transfer) 문서에도 0.9g로 선회하는 차량에서 바깥쪽 하중이 60% 늘고 안쪽 하중이 60% 줄면 전체 그립이 약 6% 감소한다는 예시가 있으며, 50:50에서 20:80으로 바뀌는 것이 정확히 같은 비율이다.
브레이크를 밟으면 하중이 앞으로, 가속하면 뒤로 이동하면서 앞뒤 그립의 균형도 달라진다. 차량이 언더스티어 성향을 보일지 오버스티어 성향을 보일지가 하중이동과 연결되는 지점이다. 하중이동은 별도로 다룰 만큼 내용이 많은 주제이므로 이 글에서는 여기까지만 짚고 넘어간다.
5. 온도와 공기압
타이어 그립은 온도의 영향을 받는다. 온도가 낮으면 고무가 단단해져 그립이 부족하고, 온도가 지나치게 높아져도 그립이 다시 떨어진다. 그 사이에 그립이 가장 좋은 온도 구간이 있다. 서킷용 하이그립 타이어인 토요 R888R의 경우 제조사는 71~105°C에서 그립이 가장 좋고, 60°C 미만에서는 그립이 부족할 수 있으며, 120°C를 넘으면 그립이 떨어지기 시작한다고 안내한다. 첫 바퀴부터 한계까지 몰아붙이면 안 되는 이유다. 타이어가 아직 적정 온도에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기압도 온도에 따라 변한다. 타이어 내부의 공기가 데워지면 압력이 올라간다. 후지어(Hoosier) R7 안내에 따르면 1톤 안팎의 차량 기준으로 냉간 시 26~28psi로 맞춘 공기압이 주행 후에는 34~36psi 이상까지 올라간다. 그래서 서킷에서는 주행 전에 맞춘 값(냉간 공기압)과 주행 직후 측정한 값(열간 공기압)을 구분해서 관리하며, 조정할 때는 주행 직후 측정한 값을 기준으로 삼는다.
주행 직후 트레드 온도를 측정하면 세팅이 적절한지도 판단할 수 있다. 안쪽, 가운데, 바깥쪽 세 지점의 온도를 측정해 비교하는 방법이다.

가운데만 온도가 높다면 공기압이 높아 가운데로만 하중을 지탱하고 있다는 뜻이고, 양 끝의 온도가 높다면 공기압이 낮아 가운데가 노면에서 들떠 있다는 뜻이다. HP Academy에 따르면 안쪽이 바깥쪽보다 10~15°C 정도 높으면 대체로 적절한 상태이며, 20~30°C까지 차이가 나면 캠버가 과하거나 토아웃이 큰 것이다. 측정은 주행이 끝난 직후 가능한 한 빨리 해야 한다. 적외선 온도계는 표면 온도만 측정하기 때문에 실제보다 낮게 측정되기 쉬워서, 바늘을 꽂아 측정하는 탐침형 온도계가 많이 사용된다.